[7호] 전주한옥마을은 언제 형성되었을까?
전주는 전통적으로 동쪽에서 서쪽을 향해 마을이 들어 앉았다. 동쪽과 남쪽이 높고 서쪽과 북쪽이 낮은 동고서저(東高西低), 남고북저(南高北低)의 지형이기 때문이다. 동남쪽 구릉지에 위치해 살았던 사람들이 평지로 옮긴 시기에 대해서는 확실한 자료가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이성계가 위화도 회군을 했던 1388년 최유경이 전주부성을 고쳐 쌓았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고려말 이전에 이미 평지에 사람들이 살고 있었고, 고려말 최유경이 성을 쌓았음을 알 수 있다.
전라감영터를 발굴한 결과 통일신라시대 유물들의 산견되는 것으로 보아 빠르게는 완산주를 설치했던 위덕왕 이후 9주 5소경체제에 완산주가 편입된 685년 이후나 늦어도 757년 '전주'로 개칭될 무렵에는 일부 평지에 사람들이 거주하거나 기관 건물들이 위치해 있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견훤이 후백제를 건국했을 때 도성체계는 승암산(중바위)를 중심으로 전주의 동쪽 구릉지대로 추정되고 있으므로 통일신라 이후 주 거주 공간은 동쪽 구릉지였을 것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오목대에서 발굴된 산성 흔적 역시 이미 그 시대에 사람들이 살고 있었음을 알려준다.
조선시대 전주성은 객사를 중심으로 형성되었다. 동문과 서문을 잇는 도로 축과 남문에서 북문으로 향하는 도로쪽이 만나는 'T'자형의 가로망을 중심으로 동서축의 중간에 위치한 객사의 남서쪽에는 전라감영이 동남쪽에는 전주부영의 관아들이 위치해 있었으며 서쪽-서북쪽에는 상민ㆍ천민의 주거지가 있었다. 전주성 동남쪽 모퉁이에는 태조 이성계의 어진을 모신 경기전과 전주이씨 시조의 위패를 봉안한 조경묘가 있다. 전주부영과 경기전ㆍ조경묘 사이 동문쪽에는 양반들이 일부 살고 있었다.
동남쪽 성벽 밖 현 한옥마을에는 전주 최씨, 전의 이씨 등 양반들이 세거하였고, 구릉을 올라가는 곳에는 자만동, 옥류동이라 하여 전통적인 자연취락 마을이 있었다. 이곳이 바로 전주 이씨 이성계의 4대조인 목조 이안사가 살았던 곳이다. 전동성당 남쪽 현 강암서예관에서 향교에 이르는 공간은 상정동(上旌洞), 하정동(下旌洞) 등의 마을 지명이 지도에 남아 있다. 그리고 경기전 동남쪽 모퉁이에서 구 도2청사(현 한국전통문화전당)까지의 성벽 밖은 한적하고 저습지가 많은 곳이었다.
한옥마을의 성장은 일제강점기 도시 상권의 변화에 맞추어져 있다. 인구 증가 및 농장 대지주와 중소상인들이 전주로 몰려들면서 1930년대 이후 신흥 한옥주거단지로 조성되기 시작하였다. 도심축에 근접해 있으면서 거주지 형성이 활발하지 않은 풍남동, 교동 일대는 새로운 택지로서의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이후 1945년까지 한옥마을은 일제강점기 전주의 고급 주택지로서 성장하게 된다.
전통적으로 자연 취락 구조의 이루어진 한옥마을 일대를 체계적으로 도시계획에 의해 개발계획을 수립한 것은 1938년이다. 30년의 계획기간을 설정하고 목표 인구 10만 명으로 책정한 이 도시계획의 기본 도로망은 1999년 전통문화특구 기본 계획에 반영되었다.
[참고문헌]
ㆍ『완산지』
ㆍ장명수,「성곽발달과 도시계획 연구」, 학연문화사, 1994.
ㆍ홍성덕 외 역, 「국역 전주부사」, 전주시ㆍ전주부사번역편찬위원회, 2008.
ㆍ홍성덕, 「전주 한옥마을의 문화다양성과 천주교」,「한국 천주교회사의 빛과 그림자」, 디자인흐름, 20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