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 | 관리자 | 등록일 | 2016-05-24 13:56:02 | 조회수 | 2790 |
사람과 사람이 통하는 인문 공간, '파사주'
해가 뉘엿뉘엿 저물어가는 초저녁 퇴근하는 사람들로 거리가 무척 붐비는 시간이다. 파사주는 많은 사람이 지나치는 객사 거리 한편의 관심을 두어 찾지 않고서는 도무지 모를, 오래된 건물의 3층에 자리 잡고 있다. 좁고 어두워 조금은 비밀스럽게도 느껴지는 계단을 따라 올라가면 어느 예술가의 작업실 같기도 하고 작은 카페 같기도 한 공간이 나온다. 이곳이 인문공간 ‘파사주’이다. 무심한 듯 놓여있는 책과 소품들에서 누구나 편하게 책을 읽을 수 있도록 한 배려한 세심함이 느껴졌다.
파사주, 책 그리고 만남을 통한 새로운 삶으로의 이행
인문공간 ‘파사주’는 책을 읽는 모임에서 출발했다. 대학 시절을 함께 보낸 친구들이 모여 지금은 없어진 한옥마을의 한 카페에서 발터 벤야민, 푸코 등의 책을 읽어온 것이 시작이었다. 모여서 책을 읽다 보니 자연스럽게 든 공간에 대한 필요성과 ‘다른 지역에는 인문학을 공부하는 모임이나 공간들이 있는데 전주에는 없냐’는 누군가의 질문이 지금의 파사주를 만들게 된 계기가 되었다. 성기석 대표는 우연히 연락이 닿은 대학 친구들끼리 심심해서 만든 모임이라며 농담처럼 웃으며 이야기했지만, 13, 4년이 넘는 시간을 각자의 삶을 살던 사람들이 함께 책을 읽고 대화를 나눌 공간을 만든다는 것은 결코 간단한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책을 읽는 것, 책을 읽는다는 것 그리고 함께 읽는다는 것에 대해 즐기면서 생각해보고자 모여서 읽게 되었다고 한다. 성기석 대표는 “책을 읽는다는 것은 저마다 삶이 변화해가는 과정이자 함께 살아가는 것에 고민해보는 것”이라고 하며 “저마다 다른 사람들이 만나 삶이 변화해 가는 즐거움을 느낄 수 있는 공간이고 사람들이 대화를 나누는 공간”이라고 소개했다. 그러므로 파사주는 어떤 공간이라고 규정 짓지 아니, 규정 짓고 싶지 않다고 했다. 어떤 지향점을 가지기 보다는 사람들이 이야기를 나누며 여기 있는 사람들의 생각이 발현되는 공간이자 참여하는 사람들이 만들어 가는 공간인 것이다.
* ‘파사주’라는 이름은 벤야민의 책을 읽고 짓게 되었다.
‘파사주’는 한 공간에서 다른 공간으로 통하는 작은 통로인데 파리에 백화점이 등장하기 이전 존재하던 상업공간으로써 최초의 현대적 쇼핑몰과 같았다.
통로, 이행이라는 의미에서 파사주라는 이름을 빌려오게 되었다고 한다.
개방된 공간이자 개방되지 않은 열린 공간
3년이 넘는 시간 동안 2주에 1번은 꾸준히 모여서 책을 읽어왔고 근대성에 관한 책을 주로 읽어왔다. 처음에는 한옥마을에 공간을 마련하였는데 사람들의 접근성이 떨어져 재작년 12월에 시내 부근인 지금의 장소로 이동하게 되었다고 한다. 파사주 공간을 꾸미는 데 있어 사람들이 편하게 모일 수 있는 공간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고, 얼마 전에는 공간에 변화가 필요하다는 생각에 새롭게 꾸미게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파사주를 좀 더 공개적으로 운영해보자는 의견이 있어 사람들이 접근하기 편하도록 서점을 내고자 했으나 건물주와의 견해차로 이뤄지진 못했다. 서점을 운영하는 것은 성기석 대표의 어린 시절 꿈이기도 했다. 그래서인지 지금의 파사주 모습이 서점과 닮아 있는 것 같기도 하다.
이곳은 세미나와 강의를 진행하고 또 사람들이 편하게 책을 볼 수 있는 서점과 같은 열린 공간이기도 하지만 아직은 회원제로 운영되고 있는 커뮤니티 공간이기도 하다. 그리하여 개방되어 있으면서도 개방되지 않은 이중적인 성격을 갖게 되었다. 아직은 공간에 대한 고민이 있어 앞으로 어떻게 변해갈지 열어두고 있다며 회원들과 이야기를 통해 다양한 시도를 해보고 싶다고 성기석 대표는 전했다.
지역의 인문 공간으로서 갖는 의미
파사주는 정기적으로 회원이 아닌 사람들이 참여할 수 있는 세미나와 강의들을 진행하고 있다. 책을 비롯한 예술, 철학 등 다양한 인문학 관련 주제를 가지고 세미나를 열어 지역사람들도 참여하여 반복되는 일상에서 벗어나 새로운 주제에 관해 대화를 나누고 소소한 재미를 느낄 수 있는 모임들을 진행하고 있다. 대부분의 강의와 세미나는 회원들이 직접 강사가 되어 진행하고 있는데, 여기에는 현실적으로 지역의 인문학 강사풀을 마련하는 게 어려운 측면도 있다. 성기석 대표는 지역에서 인문 공간을 운영하는 데 있어 어려운 점을 몇 가지 들었는데 새로운 시각을 가진 인문학 관련 강사진을 구하기 어렵다는 점과 모임을 유지하는 데 있어 후원회원 방식으로 운영하는 것에 대한 효용성을 들었다.
끝으로 성기석 대표는 누구나 이런 모임을 만들고 참여할 수 있다고 전하며 다만 함께 추구할 수 있는 공통된 부분들이 있어야 한다고 했다. 파사주는 대학 선후배들이 만나서 만들게 된 공간으로 친밀감을 넘어선 그들이 가지고 공통된 기억들이 있으므로 어느 정도 모임을 지속해갈 수 있다고 했다. 또, 독서모임은 반드시 책을 철저히 읽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단순히 책을 읽어 오는 것을 넘어서 내 삶과 어떻게 연결될지 생각해보는 자기화 과정이 필요하며 사람들과 대화를 통해 읽는 방식에 대해서도 고민해봐야 한다고 전했다.
6월 중순부터는 사람들이 참여할 수 있는 새로운 강의를 계획 중에 있다. 시즌제로 세미나 등 모임을 구성해 1년에 4차례 정도 진행할 예정이다. 또, 새로운 시각을 교류하고 책 읽기의 경험을 나누고자 다른 모임과의 연결에 대해서도 고민하고 있다. 현재는 매주 토요일 청소년 인문예술 교실인 ‘가지’에서 파사주 공간을 빌려 만화 그리기 강의를 하고 있고, 청소년 독서모임 ‘청나래’에서도 이곳에서 모임을 하고 있다.
인터뷰를 위해 방문한 이른 저녁 파사주에서는 여전히 세미나가 진행 중이었다. 다소 어려운 책에 푸념도 해보지만 다들 대화에 아주 진지하고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모습이었다. 이제 제법 날씨도 따뜻해지고 해도 길어졌다. 일과 후 모여 서로의 생각을 나누기에 좋은 계절인 것 같다. 다가오는 6월은 일주일의 하루 시간을 내 파사주에서 사람들과 인문학에 관해 대화를 나눠보는 것은 어떨까?
인문 공간 파사주가 함께 읽은 책
파사주에서 함께 읽으며 생각을 나눈 책들을 추천했다. 근대적 주체에 대한 고민과 어떻게 이런 주체들이 만들어졌는지, 그리고 다른 주체는 무엇인지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 책이다.
『증여론』, 마르셀 모스 저, 이상률 역, 한길사, 2011.
선물 교환에 관한 가장 체계적인 비교 연구서이며, 교환의 유형과 사회적 구조 사이의 관계를 최초로 정립한 연구서인 『증여론』의 해설서. 원시적 교환형태인 아메리카의 포틀래치와 멜라네시아의 쿨라, 뉴질랜드의 하우 등에 대한 민족지적 분석을 통해, 그는 증여(선물)가 사회생활의 중요한 기초라고 말한다.
『사람, 장소, 환대』, 김현경, 문학과 지성사, 2015.
인류학자인 저자는 사회를 ‘시계’, 즉 기능을 가진 구조들의 총체나 ‘벌집ㅡ재생산적 실천을 하는 주체들에 의해 재생산되는 구조’에 비유하는 구조기능주의에서 벗어나, 사람, 장소, 환대라는 세 개념을 중심으로 사회를 다시 정의하고 있다.
『신화의 힘』, 조지프 캠벨, 빌 모이어스저, 이윤기 역, 이끌리오, 2002.
신화 해설자 조셉 캠벨이 각 나라의 신화를 활용하여 신화의 본질과 그 속에 녹아 있는 큰 지혜를 들춰내 깊이 있는 삶의 방향을 제시한다.
[네이버 책 제공]
글/김선미(시민학습기자)
사진/양새롬(전주시평생학습관)·김선미(시민학습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