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 | 관리자 | 등록일 | 2019-06-25 09:42:06 | 조회수 | 1434 |
바쁘게 흘러가는 일상 속 잠시 쉬어갈 여유를 제공하는 주말처럼, 항상 출근길에 만나는 집 앞 가게의 귀여운 강아지처럼 언제나 같은 시간, 같은 장소에 존재하는 무언가는 우리들에게 꾸준한 습관처럼 받아들여진다. 그런 점에서 무려 10년이라는 시간동안 “매주 화요일 저녁7시에 전주시평생학습관에서 ‘유쾌한 인문학’이라는 인문학 강의가 진행된다.”는 점은 우리에게는 꾸준한 습관처럼 자리 잡은 것 같다.
한주의 유익한 습관 유쾌한 인문학이 지난 6월 22일 토요일에는 강의실을 떠나 모처럼 현장에서 보고 체득하는 답사를 떠나기에 동행 했다.
두 번째 진도행이다. 이른 아침 낮게 깔린 구름을 보며 비가 올지도 모른다는 걱정과 비가와도 좋겠다는 기대를 품고 버스에 올랐다. 6월의 초록이 짙게 썬팅된 차창에 가려지는 것이 서운했지만 덕분에 잠깐씩 단잠에 빠지기도 했다. 내게는 세월호의 아픔으로 더 크게 각인된 섬이지만, 오늘만은 시詩, 서書, 화畵, 창唱으로 빛난다는 보배섬 진도를 잠시라도 느껴보고 싶다. 진도대교를 건너면서 아래로 흐르는 울돌목 거친 물살과 물울음 소리를 기억해본다. 유배되어 섬에 갇힌 조선의 선비가 이곳에 섰다면 절망감은 극대화되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냈던 그들의 상처와 저항과 섬사람들의 굴곡진 삶이 만나 진도 특유의 그림과 소리와 민속과 풍경을 만들어냈을 것이다.
전통남화의 성지이며 고향이라는 운림산방에 도착했다. 몇 년 전 처음 진도에 와 이곳에 섰을 때, 끌어다 놓은 듯 느닷없이 다가온 산의 질감에 놀란 기억이 있는데, 계절이 다른 때문인지 첫 만남과는 또 다른 느낌이었다. 조선시대 남화의 대가였던 소치 허련선생(1808~1893)이 말년에 거처하며 여생을 보낸 화실이다. 앞으로 연못을 품은 전통정원이, 뒤로는 복원된 생가 초가집이 있다. 초가집 툇마루에 앉아 소박한 마당을 바라보고 있으려니 높지 않은 돌담 안쪽으로 이국적인 파초가 눈에 띈다. 파초는 속세를 떠나 욕심 없이 살아가는 선비의 삶을 상징한다고 하니 심은 이의 마음에 수긍이 간다. 돌담 밖을 나서니 작고 노란 열매가 가지 끝에 모여 달린 아담한 나무가 또 눈길을 끈다. 남해안지역에 자생하는 비파나무라고 한다. 열매를 얻어 맛보았다. 열매의 반 이상이 큰 씨앗이라 먹을 땐 성가시지만 얻은 씨를 함부로 버리기도 아까워 화분에 묻어두고 싹 트는 모습을 지켜볼 생각이다. 남도전통미술관을 바삐 둘러보고, 쌍계사는 들려볼 여유도 없이 다음 목적지로 떠나야했다. 배롱나무에 꽃이 한창일 때 다시 와서 쌍계사와 첨찰산 숲길까지 찬찬히 걸어봐야겠다.
다음 행선지는 강진 무위사와 백운동 원림. 점심을 먹은 식당 입구에서 강진 관광안내지도를 발견했다. 남도의 명소들에 문외한인 나는 큰 발견이라도 한 듯 지도부터 챙겼다. ‘2019 올해의 관광도시, 내 마음이 닿는 곳 강진’ 이라는 표제가 동백과 모란꽃 사이로 백운동 정원 그림과 어우러져있다. 무위사에 도착했다. 처음 가보는 사찰이다. 정성들인 일주문과 사천왕문을 지나고 누각을 통과해 가파른 계단을 오르면 단청을 입히지 않은 극락보전이 눈에 들어온다. 아미타여래삼존좌상과 벽화, 단아한 건축형식 등 잘 알려진 감상 포인트보다 기억에 남는 것은 극락보전 뒤편의 미륵전에 모셔진 부조형식의 석불이었다. 전문가의 솜씨는 아닐지라도 만든 이의 마음과 정성 때문일까 자꾸 눈이 가고 미소가 지어진다.
다음은 백운동 원림이다. 한쪽으로 차밭이 펼쳐진 길을 지나 차에서 내려 숲으로 향하는 길이 제법 깊다. 다산과 초의선사가 이곳을 찾은 후 백운동의 풍광에 반해 시와 그림을 시첩으로 남겨놓았다고 하니 더욱 기대가 된다. 대나무와 키 큰 동백, 연륜 있는 소나무와 초록별 잎을 넓게 거느린 단풍나무에 놀라며 잠시 걷다보니 호남의 3대 정원이라는 백운동 정원에 도착했다. 세속과 거리를 두고 숲 깊은 곳에 은둔하며 살던 선비들이 생각한 이상향은 이런 모습이었을까. 경계를 명확히 한 담장과 솟을 대문, 물을 끌어들여 만든 사각연못, 돌을 쌓아 만든 계단식 정원 등, 궁궐의 후원에서 본 듯한 모습이다. 담장 밖으로 원림을 내려 볼 수 있는 정선대라는 정자에 올랐다. 새소리 들으며, 바람에 묻어온 향기 맡으며, 멀리 월출산 기암괴석까지 내다보며 아무 생각 없이 한참을 앉아 있을 수 있을 것 같다.
몰라서 못 본 것이 너무 많은 것 같아 안타깝지만, 첫술에 배부를 일 없으니 가을 단풍 때와 동백 모란이 한창일 때 꼭 다시 찾겠다고 마음먹는다. 걸으며 느낀 풍경보다 오가는 버스 안에서 바라본 풍경이 더 많은 것이 아쉬웠지만, 야트막한 산들과 멀리보이는 월출산, 초록으로 물오른 밭과 듬성듬성 보이는 빈 밭의 황토 빛, 모내기가 끝난 논의 물자리에 비친 먼 산 그림자까지 소중히 기억해두고 싶다. 이번엔 남도의 몇 곳에 점만 찍어두었지만, 길로 이어질 본격적인 남도 탐방의 예습시간이었다 생각하고 아쉬움을 접는다.
글/김수진(시민학습기자)
사진/김종경(전주시평생학습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