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 | 관리자 | 등록일 | 2019-08-23 11:34:14 | 조회수 | 999 |
이 글을 쓰기에 앞서 저의 잘못된 여성상에 대한 인식에 대해 반성하고 고백합니다.
저는 누나가 많은 가족구성원 속에서 자라고, 자녀로는 딸 둘을 두었기에 여성에 대해 많은 배려와 관심을 가지고 살아왔다고 자부하며 살았습니다. 대부분의 50대 세대가 그러하듯 저 또한 가부장적인 문화에서 자연스럽게 베어든 삶의 방식으로 살아왔던 사람으로 지난 6주간의 페미니즘 강의를 들으면서, 여성에 대한 저의 관점이 적절했는지에 대해서 다시 성찰하는 기회가 되었습니다.
특히, 시대의 변화와 한 인간으로서의 주체성을 갖게 하는 노력은 생각했던 크기보다 더 큰 인식의 전환과 노력이 선행되어야 하고, 거창하고 거대한 담론이 아닌 일상의 생활습관으로부터 시작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저의 잘못된 언어습관을 반성하고 변화를 결심합니다.
지난봄부터 참석하기 시작한 2019 유쾌한 인문학에 “혐오에서 공감으로”라는 제목을 처음 들으면서 “어! 이게 뭐지?”하는 생각이 먼저 다가왔습니다. 대한민국 남성으로 50년을 살아온 사람이라면, 사회관습과 제도화된 유교문화의 틀 속에서 고통받아온 여성을 이해한다고 하는 것은 “페미니즘”인지 “페니미즘”인지 헛갈리는 인식정도라고 할 수 있겠지요. 그런 만큼이나 저를 포함한 남성으로 살아온 사람이 “무거운 물건은 남성인 내가 들어줄게요!”라거나 집안 청소 한번 해 주는 것을 최상의 배려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평소 무의식중에 사용하는 생활언어 가운데 여성을 비하하고 하대하는 언어가 얼마나 많은지 알면 끔직 할 정도이지요.
암탉이 울면 집안이 망한다.
여자들이란...
三從之道
여자가 배워서 뭐해!
김치녀, 된장녀, 화냥년(환향녀 : 고향으로 돌아온 여자)
여자의 적은 여자다.
사람(며느리)을 잘못 들여서 집안이 망했다.
조신해야지 여자가 뛰어다니면 되느냐!
여자의 말은 빛의 속도보다 빠르다!
출장은 김대리(남성)가 가고, 송대리 여성)는 사무실 밀린 일 좀 하지!
송대리는 출산휴가 가야잖아? 그러니 이번 과장 승진은 김대리가 먼저야!
여성은 감성적이라 냉정함을 잃기 쉬워서 판단을 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수석을 한 여성은 성격이 드셀 게 뻔해서 팀워크를 발휘하기 어렵다.
(영화 “세상을 바꾼 변호인” 중에서)
지금 들어도 어색하지 않을 공정하지 못한 이러한 표현들은 여성의 존재를 남성주의 사회적 인식의 틀 속에 규정짓는 표현이며, 여성으로서는 자기 주체성을 사회적 규범 속에 매몰시키고, 남성에게는 여성에 대한 부정적 인식을 고착화하며, 마치 권리인 것 마냥 무시로 사용해 왔지요.
인간이 인간으로서의 권리를 인정받고 주체적 삶을 찾아가기 위한 노력은 지난 수 천년동안 절대 권력에 대한 저항과 투쟁으로 이어져 왔지만, 정작 여성이 인격체로서의 권리를 찾기 위한 노력의 결실은 근 세대에 이르러서야 이루진 사실이 놀랍습니다.
대표적으로 여성 참정권은 1893년 뉴질랜드에서 처음으로 인정받은 이후 북유럽 노르웨이, 핀란드와 호주에서 전국 투표권을 인정받았을 뿐, 우리가 아는 대부분의 유럽 선진국도 1차 세계대전 이후에야 여성에 대한 참정권을 부여했고, 우리나라 또한 1948년 5월 10일 총선거로 제헌국회가 수립된 후 10년이 지난 1958년에 여성 참정권이 인정되었을 정도입니다.
이렇듯 여성이 아닌 한 인간으로서 주체성을 확인할 수 있는 참정권의 역사가 오랜 듯하지만, 세계사적으로 120여년, 대한민국은 60년 남짓에 지나지 않은 사실이 놀라울 따름입니다.
굳이 울스턴크래프트, 길리건, 파이어스톤, 버틀러 등 여성주의 철학자의 연구노력을 거론하지 않더라도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다”라는 명제 아래 여성이 “사회적”이라는 규정된 범주 안에서 어떻게 주체성을 가질 수 있는가?하는 고민은 지금 이 순간에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가령, 목소리를 크게 높여야 하고!
투쟁의 붉은 띠를 머리에 둘러야 하며!
두 주먹을 불끈 쥔 손을 하늘을 향해 올려야 하는 것인지...
끊임없이 고뇌하는 것은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인정받기 위해 풀어야 할 숙제이기도 하지요.
인간사회에 있어서 원시자본의 근원은 노동에서 시작하지요. 따라서 노동력의 극대화만이 자본을 확충할 수 있었고, 자본은 계급을 잉태하였으며, 자본 확충을 위한 야만적 약탈행위의 능력과 더불어 여성은 출산이라는 재생산의 대상화된 존재로만 인식되어온 것이 사실일 것입니다. 아울러, 노동자본의 확충을 위해 지배계급( 권력 )은 문화적, 사회적 통제수단을 마련해야 했던 일들이 근세에까지 이어져왔으며, 이후 과학문명의 발달은 이러한 사회현상에 대해 인간으로서 삶의 본질에 의문을 갖게 하였습니다. 현대 과학문명의 발달은 부엌을 변화시켰다는 말이 예사로 들리지 않지만, 비아냥거리듯 말하는 일부의 표현은 역겹기도 합니다. 마치 큰 인심을 쓰듯 “여성만 좋은 일을 시켰다”라는 표현으로 들리기 때문입니다.
결국, 사회적 인식의 전환은 과학 문명의 시대 흐름에 따라 남성과 여성이 아닌 인간으로서의 “나”를 찾아가고 인정받는 노력이 되겠지요.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남성과 여성이 아닌 인간으로서의 존재와 존엄성을 인식하고 부여하는 노력이 선행되어야 하겠습니다.
“어? 이게 뭐지?”라고 의문을 품었던 “혐오에서 공감으로”교육과정을 통해 혐오가 지난 과거에 인식되어 왔던 사회적 여성상이라면, 공감은 건설적인 미래를 위해 끊임없이 소통하며 서로의 존재를 인정하고 개인으로서의 주체성을 찾아가는 노력이겠지요.
그러한 노력의 일환으로 잦은 소통의 기회가 주어져야 할 것입니다.
소통이라 말은 하지만 우리가 언제 진정어린 소통을 해 보았는지요.
소통을 단순하게 서로의 관심사항에 대해 인식을 공유하거나, 결론을 확인하기 위한 대화정도가 아니라, 상호간의 치열한 논쟁을 통해서 서로에게 의미를 부여하고, 알아가는 긴 여행임을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사회를 구성하는 절반이 여성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왜곡되고 변형된 여성상에 대한 인식의 전환과 개인으로서의 주체적인 삶을 만들어갈 인식의 공유가 필요한데, 많은 분들에게 교육되어질 수 있는 기회의 장을 전주시평생학습관에서 마련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인간으로서 보편적이고 행복한 삶, 유쾌한 사회 구성원으로서 살아갈 교육의 기회를 기대합니다.
학습자 김평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