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 | 관리자 | 등록일 | 2016-07-25 10:06:08 | 조회수 | 2363 |
- 함께 읽고 토론하고 노래하고 그림 그리는 것이 전부 -
청소년인문예술 '두 번째 교실, 가지'
"두 번째 교실, 가지"는 이렇게 만들어졌습니다.
몇몇 어른들이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우리 아이들은 무궁무진한 꿈을 꿀 수 있어야 한다고, 대학 진학을 위한 수능점수가 청소년기의 유일한 목표여서는 안 된다고요. 사실, 이미 누구나 알고 있는 바입니다. 몰라서 꿈꾸지 못하고 행동하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철'이 많이 든 어른들은 '현실'을 '직시'하라고 충고합니다. 세상은 꿈꾸는 것처럼 굴러가지 않더라면서요. 물론 "가지"의 어른들도 알고 있습니다. 그들도 꿈꾸는 대로 굴러가지 않는 세상의 한복판을 지금 지나고 있거든요.
그러나 "가지"의 어른들은 반대로 생각하기로 했습니다. 그리고 결심했습니다. "두 번째 교실"을 만들자고요. 시험점수가 최고의 기준이 되는 곳이 첫 번째 교실이라면 우리는 아이들의 꿈과 웃음이 최고의 기준이 되는 두 번째 교실을 만들자고요. 암만 생각해도, 열두 번씩 백이십 번을 생각해도 우리 아이들은 꿈꾸며 행복해할 권리를 마땅히 가지고 있으니까요.
아이들과 어른들의 "가지"
몇 명의 어른들이 모여서 그렇게 깊고 진한 고민을 나누어 보았습니다. "두 번째 교실"에서는 아이들이 무엇을 배울 수 있도록 해야 할 것인가에 대해서요. 어떻게 배울 수 있도록 할 것인가 역시 중요한 의제였습니다. 고민은 오래가지 않았더랍니다. 만장일치, ‘교육’을 선택했거든요. 이미 남들도 다 하는, 너무 많이 해서 문제인 교육을 또? 그럴 리가요. 가지는 첫 번째 교실에서 행해지고 있는 敎育이 아니라 사귀고 나누면서 서로 배우는 交育을 선택한 것입니다.
그럼 무엇을 가지고 사귀고 나누며 서로 배울 것인가. 아이들이 함께 생각할 수 있는 것을 고르자. 재미있게, 즐겁게 할 수 있는 것으로. 그래서 주변의 아이들에게 자문했더랬죠. 재미있게, 즐겁게, 무얼 함께 하고 싶니?
소설 읽고 싶어요. 우리나라 소설도, 남의 나라 소설도. 읽으면서 재밌고 읽고 나서 심장이 오그라드는 그런 소설요. 좋은 음악 듣고 싶어요. 아, 악기 배우고 이런 거 말고, 그냥 하릴없이 퍼질러서 좋은 음악 내리 듣고 싶어요. 재능이 있느니 없느니 소리 안 듣고 뭐든 칠하고 만들고 이런 거 하면서 스트레스 좀 풀 수는 없나요? 내 속에 내가 너무도 많은데, 어찌 정리 좀 해보고 싶어요. 이런 건 뭘 해야 가능하죠?
그래서 가지는 책을 읽기로 했습니다. 국문학도 읽고 외국문학도 읽고요. 궁금한 작가의 작품을 내리 모아 읽기도 하고 유럽의 또는 아메리카 대륙의 또는 한국의 대표작가들 작품만 추려보기도 하고 고전의 반열에 오른 작품들만 골라 읽기도 하고 상 받은 작가의 옛날 작품부터 쌓아놓고 꼼꼼 분석해 보기도 하고 등등.
그리고 가지는 음악을 이야기하기로 했습니다. 카페에서 모여 앉아 듣고 싶은 음악을 내리 듣기도 하고 음악에 관한 영화 감상을 하기도 하고 음악가들과 작품들에 대한 뒷이야기도 쑥덕거리고요.
더불어 가지는 미술도 느껴보기로 했습니다. 온 바닥에 종이를 두루마리째 펼쳐놓고 치덕치덕, 천장에서 내려오는 줄에 오만가지 그림 오려 붙여 치렁치렁.
또 내 속에 너무도 많은 나를 만나보기 위해 철학과 미학의 한가운데에서 정통하고 그 밖으로 외도하며 여행하는 철학까지 두루두루.
그렇게 시작한 가지는 적은 수의 어른과 아이들이 함께 인문학과 예술의 또 다른 세상에 발을 들였습니다. 가지에는 가르치는 사람은 없습니다. 어른들은 아이들과 함께할 뿐입니다. 그래서 가지의 아이들은 스스로 배워갑니다. 이 모습이 예뻐 보였던지, 함께 하겠다는 어른들이 더 모여주셨지요. 공감대화도 해보고 일리아드도 읽고 오디세이아 같은 고전에도 도전하고요.
딱 이년 전에 첫 번째 학기를 시작했는데 지금, 아홉 번째 학기가 진행 중이랍니다. 문득 되돌아보니 짧지는 않은 시간이군요. 아이들도 많이 자랐습니다. 하던 학교 공부 열심히 하면서 진학도 하고, 학교에 안 다니던 아이가 검정고시 후 고등학교에 입학하기도 했고요. 또 시험 봐서 어렵게 들어간 학교를 그만두고 가지의 품으로 돌아와 함께 하는 아이도 있고, 중간에 가지에 결합해서 유쾌한 이야기 시간을 지금까지 즐기고 있는 친구들도 있습니다.
, 우리 청소년 친구들이 이런 시간을 보내고 있는 동안 어른들은 무슨 일을 또 벌였을까요?
어른들과 아이들의 "가지"
간디는 교육을 ‘자신의 창조적 능력을 의식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합니다. 이것을 깨닫지 못하면 단순한 지식을 축적하는 것에 그치고 마는 것이라고요. 또, 교육의 목적은 ‘진실하며 정의롭고 편견에서 해방될 수 있도록 가르치는 데 있다.’고 스페인의 교육운동가 프란시스코 페레르가 말하기도 했다지요.
가지의 어른들도 이와 같은 생각을 했습니다. 이 교육이라는 것에 대한 바람을 실현하고 싶은데 무슨 방법이 있을까. "가지"의 아이들과 함께 읽고 듣고 말하고 놀고 창작하고 음악과 철학에 빠졌다 나왔다, 느끼고 나누고 등등. 이미 이렇게 하고는 있지만, 더 할 수 있는 무언가가 있음이 분명하고, 그렇다면 더 행복할 수 있는 무언가를 우리 아이들과 꼭 해보고 싶다는 마음, 그 마음들이 슬쩍슬쩍 모였던 것입니다.
서로의 뜻을 헤아리면 더 이상의 고민 따위 하지 않는 공통의 성향을 천만 프로 반영하여, 이 어른들은 당장에 남의 동네를 탐사하기 시작했습니다. 아무 데나 막 다닌 것은 아니고요, 크리스마스 선물을 고르는 여섯 살 아이의 두근거림을 안고 청소년 대안공간 ‘들락날락’이라든지 하자센터와 사회적기업 ‘유자살롱’ 등등을 신중히 골라 종횡무진 훑고 다녔다지요.
그뿐만 아니었습니다. 남들은 여름에 하는 캠프, "가지"는 워낙 해괴한 모임이니까 한겨울에 하지, 뭐. 아이들과 함께 손 꽁꽁, 발 꽁꽁 그러나 정수리에서는 열정적인 김이 모락모락 나는 2박 3일을 보내기도 했고 어른, 아이 모두 모여 홍동마을에 있는 ‘풀무학교’나 삼각산 아래 있는 ‘재미난 마을’ 등등을 방문해 휘젓고 다니기도 했습니다.
우리만 막 돌아다녔느냐. 때로는 멀리 사는 사람들을 부르기도 했지요. 엄기호(단속사회 저자)나 황선준(스칸디부모는 자녀에게 시간을 선물한다 저자) 같은, 이름 좀 알려지신 분들을 비롯해, 대안교육의 전문가나 ‘이름없는 학교’의 교장 선생님, 교육공간 ‘오름’의 대표라든지 하자센터의 실무자 등을 모셔다 놓고는 오만육만 가지의 이야기를 줄줄 풀어내고 가시도록 종용(!)하기도 했답니다.
끊임없이 무언가를 고민하고 실행하고 또는 실험하면서, 문득문득 이런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잘하고 있는 것일까. 이렇게 계속해도 되는 것일까. 그래서 늘 묻곤 합니다. 우리, 잘하고 있나요?
변함없고 변해가는 "가지"
"가지"의 어른들이 공부하는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스스로 부단히 던지는 질문들에 대한 답을 찾고 싶어서요. 쉬지 않고 아이들과 만나고 떠들며 소통하는 이유 또한 같습니다.
함께 하는 사람이 많든 적든 "가지"는, 변치 않고 한 길을 걷습니다. 더불어 늘 다른 길을 걸어봅니다. 소통과 교류를 통해 배움과 성장이 이루어진다고 믿고 지역 어른과 아이들이 모여 함께 읽고 토론하고 생각하고 나눔으로 세상의 다양한 것들에 대한 공감능력과 사유능력을 기를 수 있다고 믿고 있는 것이지요. 혹자는 철없는 소리라고 비웃을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가지"의 어른들과 아이들은 인문적 가치와 예술적 감성, 민주적인 토론, 상대방에 대한 배려, 나아가 세상 모든 것에 대한 공감능력과 사유능력을 기르는 것이 우리 사회의 존엄이 유지되고 연대가 살아나는 세상을 만드는 길 중 하나임을 진심으로 믿고 있습니다. 오로지 이러한 지향점을 가지고서 함께 읽고 토론하고 노래하고 그림을 그리는 일을 철딱서니도 없어 보이게 신이 나서 해나가고 있는 것이고요.
"가지"는 거창한 목표와 목적을 세워놓고 단계적으로, 과학적이며 교육학적으로 방법을 구상해서 만들고 운영하는 조직이 아니랍니다. 다만 함께 나눌 수 있는 다르거나 혹은 다양하거나 한 가치-자유, 열정, 모험, 공감, 용기 등등- 들을 알아가고 품기 위해서 더는 하나의 교실에 갇혀 있어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을 했고, 이 생각을 풀어내기 위해 일단 각자가 서 있는 자리에서부터 서로 사랑하고 연대하고 생각하고 공유할 수 있는 그런 움직임을 만들어 냈을 뿐이랍니다.
그리고 알고 있습니다. 그 움직임이 아직 참 미약하다는 것을요. 하지만 조급해하거나 패배감 따위 절대 느끼지 않습니다. 적은 수이지만 "가지"의 아이들과 어른들은 행복합니다. 서로에게서 많이 배우고 있습니다. 생각이 자라고 있고 품이 넉넉해지고 있습니다. 교육과 일상은 분리되지 않습니다. "가지"는 그것을 알고 있습니다. 사람이 중심이 되는 가치를 얻어가는 일상. 앞으로도 "가지"가 변치 않고 지켜갈 약속입니다.
- 이 선 (워크숍 초청강사)"
글·사진/이재은(진북문화의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