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 | 관리자 | 등록일 | 2016-10-20 16:18:52 | 조회수 | 2096 |
공동창조공간 누에(nu-e)
- 기억을 딛고 미래를 묻다 -
오월의 어느 날, '행복한 결혼식'이 열리고 장맛비가 내리던 저녁에는 예술가들의 작업장이 되고, 파티장과 캠핑장으로도 변했다가 낙엽이 질 무렵에는 기억이 아로새겨지는 곳.
우리는 이곳을 '공동창조공간', 그리고 '문화놀이터'라고 부르기로 했다.
"누에란 누워 있는 벌레라는 말이 변한 것이다. 누에의 한자말은 하늘 아래 벌레이다. 하늘의 벌레라고 여겨졌기 때문이다. 누에의 나이는 령으로 표시한다. 1령에서 5령이 지나면 늙은 누에가 되어 실을 토해내고 번데기가 되어 나방이 된다. 나방은 다시 누에알을 두고 생을 마감한다. 폐산업시설이 된 완주 잠업시험장은 휴면 알의 시기를 보내고 1령의 시기를 보내고 있었다. 알을 남기고 간 시간들을 다시 꺼내어 살펴본다. 누에의 나이만큼 잠을 자던 곳에서 누에의 령이 다시 살아 숨쉰다. 그는 버려진 땅 어딘가에 올라서 이곳이 잠령비가 있었다고 알려줬다. 오래 전 일하던 이곳에서 기억을 더듬으며 이 잠령비는 다시 어느 곳에 옮겨졌고 그 잠령비는 누에의 생에 대한 은혜를 기념하기 위해 세웠다고 했다. 일하던 동료들은 사라지고 기억하던 곳은 사라졌지만 그의 기억 어딘가에는 아주 활발하게 움직이던 잠종장 이었다."
- 장근범 아카이브 사진전 <잠령(蠶靈)> 작가노트 중 -
공동창조공간 누에(nu-e)
처음에 이곳을 소개할 때 "완주군청사 인근에 있는 옛 잠업시험장(잠종장)"이라고 해도 어디인지 잘 모르는 분들이 많았다. 그도 그럴 것이, 이미 6년 동안이나 기능이 정지해버린 "폐산업시설"이었던 것이다. 아니, 어쩌면 장근범 작가가 그의 작가노트에서 말했던 것처럼 이곳이 '일하던 동료들은 사라지고 기억하던 곳은 사라진' 곳이었기 때문이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래서일까. 처음 이곳을 방문했을 때 엉뚱하게도 '잠자는 숲 속의 공주'가 떠올랐다. 물론 너무 지나친 상상이었을지도 모른다. 사실, 공주치고는 좀 '거대'하기도 했다.
그렇게 6년 넘게 잠들어 있던 이곳이 문화체육관광부의 「산업단지 및 폐산업시설 문화재생사업」으로 드디어 깨어나게 되었다. 딱딱하고 다소 길게 느껴지는 이 사업의 명칭을 문자 그대로 해석하자면 이렇다. '기능이 정지한 곳에 문화로서 새로운 기능을 부여하는 것'. 어떤 기능이 사라진 자리에 새로운 기능을 부여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차라리 아예 '무(無)'에서 시작하는 것이 더 나을지도 모른다. 거기에 '문화'로서 기능을 부여하다니. '문화'라는 개념은 때때로 만병통치약처럼 쓰이기도 하지만, 그만큼 모호하기도 하다. 우리가 문화를 통해 '자아를 실현하기도 하고, 축제를 통해 열광하기도 하며, 타인에 대한 관용과 이해를 위해 부단히 노력하기도 하는 것'처럼 말이다.
한동안 '문화'와 공간의 '쓰임'에 대해 궁금하던 차에 문득 새로운 이름인 '공동창조공간'이라는 단어에 대해 궁금증이 일었다. 공동(共同), 누군가와 함께. 창조(創造), 무엇인가를 만들어 내는 공간. 우선 이 이름을 위해서는 함께하는 '우리'가 필요했고, 만들어내는 '무언가'가 필요했다. 그리고 바로 그것이 '문화'였다.
이 '문화'는 오롯이 '예술가', 또는 '주민'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예술가와 주민, 전문가와 행정이 '관계를 형성'하며 만드는 것이다. 이것은 기존 문화향유의 공식-예술가가 문화를 생산하고 주민이 그것을 소비하는 방식–을 뛰어 넘는 새로운 "예술경험"으로서의 문화이기도 하다. 즉 창조와 향유의 주체를 잇는 '연결의 동인'이자 '창의적인 예술 활동의 비전'인 셈이다. 이는 이 공간을 운영하는 (재)완주문화재단 G3아트플랫폼사업단이 붙인 '누에'(nu-e; new art experience, new experiment, new education, new energy ...)라는 이름에서도 드러난다.
그동안 공동창조공간 누에(nu-e)에서 진행해 온 다양한 파일럿 프로그램들을 보면 공동창조공간 누에(nu-e)에서 지향하는 '문화 놀이터'의 방향을 엿볼 수 있다. 예를 들면 '예술점거 프로젝트 <견>'의 예술점거단은 자신의 창작활동과 더불어 수다모임, 작가와의 대담, 비보이 댄스 배틀, 디제잉파티, 드로잉 모임, 전시회 등 대중과의 만남을 가지기도 하고 주민참여프로그램 '묘한 놀이터'에서 자발적 참여를 통해 멘토로 활동하기도 한다. '행복한 결혼식 디자인', '벽화캠프', '문화생산자네트워크파티', '예술점거 프로젝트 <견>', '전북아이디어융합창작캠프', '묘한 놀이터', '아카이브-e' 등 10여 개가 넘는 파일럿 프로그램들이 바로 이렇게 만들어진 결과물이다.
올해 5월부터 다양한 파일럿 프로그램으로 끊임없이 실험을 해온 '공동창조공간 누에(nu-e)'는 10월 29일(토) 퍼포먼스 공연 'A day in the life'를 시작으로 11월 중순까지 'nu-e festival'을 진행할 예정이다. 이 기간 주민참여프로그램 '묘한 놀이터'의 8개의 주민모임과 더불어 예술점거프로젝트 <견> 2차 예술점거단, 그리고 예술가와 지역의 주체들이 활동할 예정이며 이들이 협업할 수 있는 다양한 연계방안을 모색하고 있다.
공동창조공간 누에(nu-e)에 바라는 점이 있다면, 지금까지 보여 준 부단한 노력처럼 '함께 만들어가는 창조공간'이자 끊임없는 실험이 이루어지는 지금의 '문화놀이터' 정신을 잃지 않았으면 한다. 그리하여 얼마간의 시간이 지난 후, '기억을 딛고 미래를 물을 수 있는' 매개의 공간이 되었으면 한다. 그리고 그것은, 어쩌면 우리 모두의 몫일지도 모르겠다.
글·사진/오민정(누에nu-e 관계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