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 | 관리자 | 등록일 | 2016-11-25 15:39:57 | 조회수 | 1462 |
괴테 - 파우스트
<파우스트>는 크게 2부로 구성되어 있다. 1부는 우주와 창조의 비밀을 알고자 모든 학문을 섭렵한 파우스트가, 결국 진리를 파악하는 데 실패하는 연속된 절망을 다루고 있다. 학문으로도, 마술로도, 심지어 악마 메피스토펠레스와의 계약에도 불구하고 파우스트는 처절한 비극을 피하지 못한다. 1부에서 가장 끔찍한 비극은 순결한 소녀 그레첸이 악마의 꼬임에 빠져 어머니를 살해하고, 오빠를 파우스트 손에 죽게 만들며, 끝내는 사생아인 아기마저 익사시켜버리고 마는 장면이다. 사형수가 된 그레첸은 파우스트의 탈출 제안을 거절한다. 오히려 "하나님, 심판하소서! 당신의 손에 절 맡기겠나이다!" 라고 기도한다. 이 때 헤어날 길 없는 비극의 심연에 빠져 있는 파우스트는 "아아, 나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하고 절규한다. 1부는 여기에서 그 비극의 막을 내린다.
2부는 1부와 완전히 그 분위기가 다르다. 1부는 그나마 우리의 일상적 삶에서 접할 수 있는 체험을 기반으로 하기 때문에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지만, 2부는 인간 정신이 지닌 심오한 차원을 종교와 철학, 학문과 예술의 차원에서 다루고 있기에 대체로 난해한 편이다. 시대를 넘나들기도 하고, 강력한 권력을 소유하기도 하지만 이내 실망한 파우스트는 제작된 인간인 호문쿨루스의 도움으로 고대 그리스의 고전적 발푸르기스의 밤 축제에 가게 된다. 이후 파우스트는 트로이전쟁에 참전하여 헬레나를 차지하게 된다. 헬레나와 함께 낙원 같은 아르카디아에서 결혼해서 아들 오이포리온을 낳지만 아들은 사고로 죽게 되고, 이어 헬레나도 저승으로 돌아가고 만다. "즐거움 뒤에는 이내 무서운 슬픔이 따르는구나." 결국 파우스트는 다시 참담한 체념에 빠지고 만다.
기적적으로 다시 일어선 파우스트는 초월적 세계를 내버리고 지상세계에서 공익을 실천하고자 마음먹는다. 인식과 향락이 아닌 행동하는 삶을 선택한 것이다. 그러나, 거대한 개간 공사를 하면서 파우스트는 '근심'이라는 요녀로 인해 눈이 멀고 만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눈이 멀면서 내면이 밝아진다. 이 상태에서 깨달음을 얻은 그는 최고의 기쁨을 만끽한다. 드디어 그 유명한 "멈추어라, 너 정말 아름답구나!" 하고 순간을 향해 포효한다. 악마와의 기나긴 계약이 종료된 것이다. 이 때 1부에서 죽었던 옛 연인 그레첸이 나타나 파우스트에게 구원의 은총을 내려 줄 것을 하늘에 간구한다. 성모는 파우스트의 영혼을 데려간다. 천사들은 "영들 세계의 고귀한 한 사람이 악으로부터 구원되었도다. 언제나 열망하며 노력하는 자, 그 자를 우리 구원할 수 있노라." 라고 노래한다. 파우스트는 구원받은 것이다.
방대한 내용을 짧게 요약했지만 분명한 건, <파우스트>라는 작품 속에는 땅과 하늘, 지성과 욕망, 성속(聖俗)과 미추(美醜), 위대함과 죄악 등 역사와 인생의 총체가 담겨 있다. 기독교적 비유들과 함께 세속적 인본주의, 그리스의 신화와 인문학이 복잡하게 얽혀 있다. 그렇기 때문에 <파우스트>는 몇 가지로 그 의미를 간추리기가 불가능하다. 아니, 의미 파악은커녕 실상은 <파우스트>를 읽는 것 자체가 고난인 것이다. 하지만 "고난이 있을 때마다 그것이 참된 인간이 되어 가는 과정임을 기억해야 한다"는 괴테의 유명한 격언에 기대어 본다면, 비록 비유와 행간 속에 숨어 있는 무한한 의미의 보석을 발굴하지는 못했지만, <파우스트>를 읽고 사색하는 고난의 시간은 분명 내가 더 나은 인간이 되어가는 과정이 되었다고 믿는다. 하여, 아래에서는 단편적이나마 개인적으로 인상 깊었던 장면들과 사색들을 정리해보고자 한다.
1부에서 가장 눈에 띄었던 대목은, 메피스토펠레스와 대화를 하는 주님의 말이다. "인간은 노력하는 한 방황하는 법이니라." 전에도 많이 들었던 이 말은 살면서 큰 힘이 되었다. 노력하지 않으면 방황하는 일도 없을 것이기에, 내가 지금 방황하고 있거나 불안해하는 것이 노력하고 있음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주님은 이어서 말한다. "선한 인간이란 어두운 충동 속에서도 올바른 길을 잘 알고 있다." 여기에서 나는 자연스럽게 어느 융학파 정신분석가의 말이 떠오른다. "수많은 사람들이 정신치료의 과정이나 영적 성장의 과정에서, 자신이 좋지 못한 사건으로 여겼던 것이 실제로는 훨씬 긍정적인 사건이었음을 알게 된다. -중략- 그들은 근원적으로 어두운 상태가 축복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노력과 방황의 의미를 심리학적으로 더욱 깊이 생각하게 된 게, 내게는 이 대목에서 얻은 가장 큰 소득이다.
인간의 역사는 역사학자 토인비의 말처럼 '도전과 응전'의 연속이다. 역사의 이러한 측면이 신화나 종교에서는 선악의 대립이라는 이야기로 구축되었을 것이다. 요컨대 인간은 악을 통해서만이 선을 인식하게 되고, 어둠을 통해서만이 빛을 통찰하게 된다. 그래서 <욥기>나 <파우스트>에서도 신과 악마와 인간의 대화나 계약이 비유로 쓰였으리라 상상해 볼 수 있다. 쉽게 이해하기 어려운 신과 악마의 내기, 인간과 악마의 계약이 영적 성장과 문명의 건설을 위해 필요했던 것이다. 2부에서의 파우스트의 말을 빌려 정리해 본다면, "인간 지혜의 마지막 결론이란 이러하다. 자유도 생명도 날마다 싸워서 얻는 자만이, 그것을 누릴만한 자격이 있는 것이다."
1부에서 감격적이었던 장면을 하나만 더 말하자면, 사랑과 욕정 때문에 모든 것을 잃은 그레첸이 자신의 맹목적인 열정이 저지른 죄를 인정하고 탈출하기를 거부한 대목이다. "밖에 무덤이 있다면, 죽음이 날 기다리고 있다면, 그럼 가겠어요! 여기에서 영원한 안식처로 가서, 더 이상은 한 걸음도 움직이지 않겠어요." 구제할 수 없는 죄책감에 사로잡힌 그레첸은 파우스트의 간청을 거절하고, 사형을 받아들이는 것으로 자신의 죄를 감당하려는 것이다. 이러한 눈물겨운 그레첸의 양심 때문인지, 메피스토펠레스가 내린 "그 애는 심판받았소!" 라는 저주와 달리, 위에서는 어떤 목소리에 의해 "구원되었도다!" 라는 감동적인 선포가 울려 퍼진다. 내가 여기에서 환기한 것은 <논어>의 "잘못을 고치려 하지 않는 것을 잘못이라 한다."라는 문장이다. 인간은 누구라도 죄를 지을 수 있고 실수를 저지를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잘못을 잘못이라고 알고 반성하며 고치려는 양심적 태도일 것이고 동시에, 그 잘못에 대한 대가를 감수하려는 결단인 것이다.
2부에서는 파우스트가 근심이란 요녀에 의해 눈이 멀게 된 전후의 상황이 많은 생각을 하게 하였다. 요녀는 근심을 포함하여 결핍, 죄악, 곤궁 이 넷이다. 근심을 제외한 나머지 셋은 죽음이 다가오자 도망가 버린다. 아마도 이 광경은 인간 삶의 본질에서 근심이 가장 고통스럽고 끈질긴 장애물을 함의하는 게 아닐까 추측해본다. 요컨대, 요녀 근심의 말처럼, 근심은 인간의"영원한 불안스러운 길동무"인 것이다. 근심은 말한다. "누구든지 제가 한번 잡기만 하면, 그에겐 온 세상이 소용없게 되지요. 영원한 암흑이 내리덮히고, 해는 뜨지도 지지도 않으며 -중략- 행복도 불행도 시름으로 변하고, 풍부한 속에서도 배고파 굶주리며, 즐거운 일이든 괴로운 일이든, 모조리 다음날로 밀어젖히고, 오로지 미래만을 기대하고 있을 뿐, 완성될 날이라곤 결코 없을 거예요." 어쩌면 근심의 핵심은 이 문장의 마지막에 있는 것처럼 '오로지 미래만을 기대'하는 태도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본다. 지금 이 순간의 생생한 현실과 즐거움은 '기대'로 말미암아 늘 적막 같은 근심으로 변질되었음을 나는 부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
여하튼 근심 요녀는 "인간들은 일생 동안 앞을 보지 못하고 지내니, 파우스트여, 당신도 이제 장님이 되세요!"라며 독김을 내뿜어 파우스트의 눈을 멀게 만든다. 놀라운 것은 파우스트는 맹인이 되고서야 비로소 눈을 뜨게 된다는 역설이다. "밤이 점점 더 깊어가는 것 같은데, 마음속에서만은 밝은 빛이 빛나고 있구나." 내면은 빛으로 가득 차게 된 것이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기획을 더 가열차게 진행한다. 파우스트는 "밖에서 거센 파도가 미친 듯 제방까지 밀려온다 해도, 여기 이 안쪽은 천국과 같은 땅 -중략- 자유로운 땅에서 자유로운 백성과 더불어" 살 수 있게 된 최고의 아름다운 순간을 드디어 맞이하게 된다. 내가 여기에서 주목한 것은, 근심과 대결해서 장님이 된 파우스트가 얻어낸 '빛'이라는 비유이다. 지나치게 바깥과 외모만을 중시하는 현대인의 태도는 인간의 타고난 내면의 빛과 풍요로움을 무시하고 있기에, 이 비유는 진정한 실존적 각성을 촉구하는 외침으로 들리기 때문이다.
끝으로, 내가 느낀 파우스트의 위대함은 그 성취에 있는 것이 아니라, 초인적인 노력과 열망에 있음을 기록해두고 싶다. 비록 그의 초월 욕구는 오만함처럼 보이는 태도에서 출발했지만, 자신의 유한성을 극복하려는 지속적인 노력과 고난의 방황에서 급기야 구원과 불멸성을 획득하게 된 것이다. 다시 말해서 내가 이번 독서에서 절실하게 얻은 깨달음이 있다면, 나는 파우스트가 끝까지 보여준 이러한 지향성이, 인간이 인간답게 살 수 있는 '황금 나침반'으로 인류에게 영원히 기능하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는 신뢰이다.
화요실존철학회 대표 이 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