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 | 관리자 | 등록일 | 2016-03-22 17:04:30 | 조회수 | 2087 |
잠수복과 나비 - 장 도미니크 보비
(원제:Le scaphandre et le papillon)
양현(지혜의 숲)
지난날의 ‘상처’ 하나가 계속해서 나를 집요하게 따라다니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의식적으로 혹은 무의식적으로 묻고 또 물었다. 그 상처의 경험은 도대체 무슨 의미인가? 하지만 솔직히 말해서 나는 묻고 싶지 않았다. 묻는 게 너무 괴로웠기에, 묻지 않아야 살 수 있을 것 같았기에. 하지만 물어졌다. 묻는 말들이 끈덕지게 다가와서 물어졌다. 시간이 흐르면서 물어짐의 차원이 바뀌고 물음을 둘러싼 기분이 변해갔다. “왜 나에게 그런 일이!”라는 분노의 절규에서, 두려움과 떨림 가운데 “그 일이 일어난 건 왜?”라는 의미의 탐색으로 전환되어졌다. 마침, 그때 만난 도미니크 보비의 『잠수복과 나비』가 전환된 물음과 변화된 기분에 명료한 의미를 부여해주었다. 발화의 표현을 얻은 것이다. 즉, ‘그것’이 울분의 에피소드나 무의미의 반복이 아니려면, 사고(事故)가 아니라 사건(事件)이어야 한다고.
사고(事故)란 무엇인가? 사고는 내게 다가온 특이한 일을 반항적으로 대꾸해 애초의 모습으로 되돌리려는 해프닝이라고 말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사고는 얼른 그것을 복귀시켜 원래대로, 아무 일 없다는 듯이, 일시적 교란에 지나지 않는 무의미한 일로 간주해 서둘러 봉합함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사건(事件)이란 무엇인가? 사건이란 그 일로 인해 내 삶이 변화해야 한다는 사실을, 회피가 불가하게 육박하여 틈입해온 그것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부연하면, 사건은 애초에 계획했던 에고의 방향과는 전혀 다른 목적지를 지시하는, 즉 ‘자기’의 삶으로 몰아치는 곡절(曲折)의 계기요, 오에 겐자부로의 용어를 빌리자면 ‘정통적 삶의 강요’이다. 요컨대, 사고가 유아기적 상태로 퇴행하는 것을 고집하는 본능적 반응이라면, 사건은 더 나은 위를 향한[向上] 도정의 이정표로 삼는 본성의 반향이다.
그래, 요새 내가 부쩍 자주 했던 생각이 이런 거였다. ‘그것’이 무의미하지 않기를……. ‘그것’, 그러니까 나에게 일어난 혹은 일어날 그 일[들]이 ‘사고’가 아닌 ‘사건’이 되게 해달라고 끈질기게 염원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이 단순 사고로 기록될까 봐……. 마치 기억되지 않는 역사처럼 반복될까 봐 나는 무척 염려하고 있었다.
주인공 장 도미니크는 큰 ‘사고’를 당했다. 식물인간이 되었다. 그는 비참한 자신의 처지와 힘겹게 분투한다. 다행히, 그를 사로잡았던 회한과 좌절의 긴 시간을 벗어나 서서히 변화를 긍정하게 된다. ‘사건’으로 전환된 것이다. 그때 비로소 진정한 의미의 새 삶이 모색된다. 도미니크는 말한다. “나는 점점 멀어진다. 아주 천천히. 그러나 확실히 멀어지고 있다. 항해 중인 선원이 자신이 방금 떠나 온 해안선이 시야에서 사라져 가는 광경을 바라보듯이, 나는 나의 과거가 점점 희미해져 감을 느낀다. 예전의 삶은 아직도 나의 내부에서 불타오르고 있지만 점차 추억의 재가 되어버린다.”(105)
도미니크는 침묵과 명상으로 자기에게 벌어진 불운을 물었던 것이다. 불운의 의미를 묻고 또 물었던 것이다. 마침내, 그 긴 의미 찾기의 여정에서 도미니크의 잠수복은 나비가 되었다.“(…) 다시 침묵이 찾아오면, 나는 비로소 내 머릿속에서 팔랑팔랑 날아다니는 나비들의 움직임에 귀를 기울일 수 있다. 나비의 날개 짓은 아주 미세하기 때문에, 이를 감지하기 위해서는 명상에 가까운 주의력이 필요하다. (…) 내 청각은 향상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나비 소리를 점점 더 잘 듣게 된다.”(133-134) 이제 도미니크는 지금이야말로 새롭게 살 수 있음을 천명한다. 변화는 수용되었고 새로운 삶이 시작된 것이다. 여기에서 나는 오랜 질병에서 회복기를 맞은 한 철학자의 말이 떠오른다. “커다란 고통이야말로 정신의 최종적인 해방자이다. (…) 시간을 끄는 길고 오랜 고통, 생나무 장작에 불태워지는 고통만이 비로소 (…) 우리가 지닌 궁극적인 깊이에 이르게 하고(…)” 이처럼 감당할 수 없는 파국에 이르러서도, 사건이 되면, 멈추어 심연을 들여다볼 수 있는 용기를 얻을 수 있음을 나는 이 책에서 배웠다.
이제 나는 감히 바란다. 그 쓰러지는 날이 진정으로 일어서는 날이 되기를. 모든 불행과 상처와 고통이 진정한 치유가 시작되는 사건의 날이 되길 기원하는 바이다. 편협한 에고의 잘못된 길을 버리고 과감히 나의 길을 향하길 희구한다. 나의, 고통과 치유에 대한 사색은 여기에 이르렀다. 그런데, 놀라워라, 도미니크를 읽으면서 얻은 나의 자그마한 깨달음이 하이데거가 말하는 ‘치유’와 일치하는 것이다. 그는 말한다. “‘치유된다(Genesen)’는 (…) 귀향하다를 의미한다. 노스탤지어(Nostalgie)는 고향을 그리워하는 아픔, 향수병이다. ‘치유되고 있는 자’는 귀향하려고 마음을 가다듬는 자, 말하자면 자신의 사명으로 나아가려고 하는 자이다. 치유되고 있는 자는 자기 자신에게로 향하는 도상에 있으며, 따라서 자신이 누구인지를 자신에게 말할 수 있다.”
정리해보자. 내가 이 책을 읽고 크게 감동한 이유는 무엇일까. 무엇보다도 일차적으로는, 아마도 남 일이 아니라고, 내 일일 수도 있다고 ‘공감’했기 때문일 것이다. 나도 결국 어떤 식으로든, 도미니크처럼 느닷없이 쓰러지는 날을 맞이하게 될 것이기에. 하지만 진정으로 감동한 이유는, 그때, 그러니까 아주 큰 격변을 당할 그때, 올 수밖에 없는 비극의 화살과 조우할 때, 이를 사건으로 바라보는 지혜와 위안이 필요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때 나는, 도미니크가 떠오르길 그래서 바라는 것이다. “철학은 죽음의 연습”이라는 어느 철인의 말은 이 모든 나의 감동을 멋지게 압축한다. 요컨대, 그 공포의 순간에, 나는 도미니크의 나비가 떠올라주기를 간절히 바라는 것이다. 신이시여, 부디 그때를 사건이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