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 | 관리자 | 등록일 | 2016-04-22 11:00:01 | 조회수 | 1860 |
학교에서 배웠지만 잘 몰랐던 미술 - 이명옥
이성적인 성장에 관심이 없는 삶은 어떤 것인가?
이성적인 삶이 감성적인 삶보다 우위에 있다고 단언할 수 있는가?
과학의 시대가 열리면서 예술가들의 삶이 초라했던 때가 있었다. 자본주의와 제국주의가 만연하던 시대에 예술가로 사는 것은 고뇌였다.
“인생은 살기 어렵다는데 시가 이렇게 쉽게 쓰여 지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란 윤동주의 말이 예술가로의 삶은 내면과의 싸움이면서 그 시대를 그냥 스쳐 지나치지 못하게 함을 일깨운다. 그래서 마음속에 양심이라는 별 하나를 간직하고 깨어있는 ‘의식인’으로 살게 한다.
어떤 이성도 감성보다 앞서지 않으며 또한, 어떤 감성도 이성을 억누를 수 없다.
그림을 감성의 소유물로 여기며 밥 먹고 사는 데 어려움이 있는 영역이라고 치부하기 어려운 시대가 도래했다. 이것은 예술가들의 표현이 단순히 눈에 보이는 것, 자기만의 이기적이고 사치스런 감정이 아닌 세상을 비판하고 남과 다른 시각으로 바라보면서 스스로 심연으로 들어가는 고독을 두려워하지 않기 때문이다.
나의 학창시절은 그림에 관심이 없었다.
대개 이런 핑계 때문이다. ‘그림에 소질이 없어서’라는.
다행히도 성인이 되면서 어쩌면 소질과 상관없단 생각이 들었다.
단지 그림을 과감히 표현할 자신이 없었고, 그림을 그린 후 사람들의 반응에 겁을 먹었다. 사실은 용기의 부재였다. 용기의 부재는 잘 하고자 하는 욕망에서 나오는 것이고, 타자의 시선을 누구보다 많이 의식한다는 의미일 것이고, 무엇보다 나 자신을 드러내는 것은 인파가 많은 광장 한복판에 벌거벗겨지는 두려움을 수반하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인간인 나의 감정 이면엔 성인이 되면서 마음 한 편에 그림을 그려보고자 하는 마음이 남아있고, 이제는 나름대로 색과 선으로 그림을 그린다. 그 과정을 통해 나의 감정을 들여다보는 힘이 생기기 시작했다. 그림에 문외한일수록 그림을 읽는다는 것은 자신의 내면을 이해하는 가장 강력한 도구로 쓰이기에 적합하다. 그리고 그림을 통해 배웠다. 고수가 아니더라도 하수의 시선이더라도 자신만의 시선으로 삶을 바라보는 힘이 얼마나 소중한 것이며 진실 된 삶임을 알게 되었다. 마치 모든 책은 작가의 손을 떠나면 독자의 것이 되듯, 그림도 화가의 손을 떠나면 그 그림을 만나고 보는 이의 것이 되는 것과 같다.
그런 이유로 나는 종종 다양한 작품을 다양한 시각으로 해석한 책들을 읽는다.
특별한 용어를 몰라도 된다.
김춘수의 "꽃"처럼 내가 그 그림을 해석하고 이해하는 관심의 시선으로 바라봐 줄 때 그 그림은 이제 나에게로 와서 나만의 그림이 되기 때문이다.
이런 그림책은 되도록 독서동아리에서 함께 읽기를 권한다. 내가 찾지 못한 그림의 구석구석을 여행할 수 있고, 작가와 그림을 이성과 감성 사이에서 보는 시간을 선물 받을 수 있다.
그림을 통한 타임머신의 여행은 특별하다. 르네상스 시대로 혹은 혁명의 시대로 전쟁의 시대로 어디든지 갈 수 있다. 시간으로의 여행뿐 아니라 독일, 이탈리아, 스페인, 프랑스, 미국 등 공간으로의 여행도 가능하다. 게다가 지식의 탐닉까지 곁들인다. 바로 이성과 감성의 줄타기를 할 수 있다. 물론, 하수의 시선이겠지만.
독일 출생의 ‘알프레드 뒤러’는 최초로 서명한 화가라고 한다. 당시 유럽의 문예 부흥에 비해 뒤떨어진 문학사조를 지녔던 독일인으로서 자부심을 느끼고 싶었나 보다. 그래서인지 2년의 시차로 그려진 그의 자화상에서 느껴지는 에너지는 크게 다르다. 그는 화가가 단순한 기능공이 아닌 예술가임을 강조하고자 했다.
종종 ‘기형도’ 시인과 비교되는 ‘에곤 실레’의 그림은 그 자체로 고뇌란 단어를 떠올리게 한다. 그의 고뇌는 청춘기의 자기 분열적인 느낌마저 보인다. 철저히 자기 고뇌에 휩싸여 정통성에 저항하던 ‘에곤 실레’는 실존주의에 모티브를 주고 이런 예술가들이 문학사를 발전시키는 영향력을 행사했다. 문예 출판사의 "구토"의 책표지는 ‘에곤 실레’의 자화상이다. 내 느낌은 구토의 깊이와 무게에 비하면 이 표지는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이랄까...
18세기 스페인의 궁정화가였던 ‘프란시스코 고야’는 당시 무능했던 카를로스 4세를 비웃기라도 하듯 나약한 시선 처리를 사용한다. 물론, 고야의 경계는 모호하다. 그의 권력지향과 권력비판은 시소를 타는 듯하다. 경계의 위에 설 때 그 시선을 모두 자신의 것으로 만들 수 있지만, 경계의 언저리에서 두리번거리다 보면 어느 것에도 속하지 못하는 정체성의 혼란을 일으킨다. 그러나 고야의 내면은 냉철한 계몽주의의 성향에서 벗어나지 않으려 했었다.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들라크루아’의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에서 여성성의 부각이 의미하는 바를 추측하는 기쁨, ‘르네 마그리트’의 초현실주의적 상상력에서 오늘날 영화 소재가 되기도 하는 연관성을 찾는 행복, 무엇보다 그의 [사적인 가치]란 작품처럼 작품명 그 자체가 내 맘으로 쏙 들어오는 짜릿함까지 통틀어 느끼는 책으로 손색없다.
내가 읽은 "학교에서 배웠지만 잘 몰랐던 미술"이란 책에서 나는 시공간의 여행을 떠났다.
하수의 시선으로 이성과 감성을 모두 놓치지 않으려 애쓰면서.
윤현주(퀀텀리프 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