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수예(니체 세미나 참가자)
종래의 이데올로기를 전복시킨 '자유로운 영혼' 이라고 막연하게 알고만 있던 니체.
심지어 '짜라투스트라'와 동일시하여 인식할 정도로 (아직도 이는 나에게 있어 해결되지 않은 부분이긴 하지만) 무지했던 내게, 아주 유익한 소식이 날아들었다.
'시민 인문 세미나' 회원 모집. 미래 교육, 텍스트와 세계, 공자, 함께 살아가기, 니체 강독. 다섯 분야의 세미나 형식의 인문학 모임이었다.
설레었다. 뒤늦게 발동된 인문학적, 철학적, 인류 문명사적 호기심..
니체 강독 세미나는 니체의 마지막 저작이자 자서전 격인 '이 사람을 보라'를 함께 읽으면서 그의 진면목을 이해해보고자 하는 시간이었다.
니체는 내가 체감하는 것보다 훨씬 현세에 가까운 사람이다. 그의 명성과 독보성으로 꽤나 고대의 사람으로 인식되어 왔기 때문에 자꾸 그의 연대를 되뇌이게 된다. 1844 년에서 1900 년이라는 그의 생몰 년도. 그는 불과 150여 년 전 사람이다.
'나는 왜 이렇게 현명한지, 영리한지, 좋은 책들을 쓰는지 그리고 왜 나는 하나의 운명인지'와 같은 예사롭지 않은 소제목들이 보여주듯, 니체는 '정말 멋지다'라는 감탄사가 절로 나올 정도로 매력적이라는 것을 확인하고야 만다. 밉지 않은, 얄미운 사람이라고 감히 표현해도 될지......
특별히 와 닿은 부분을 하나면 꼽는다면, '도덕의 계보'라는 딱딱하기 그지없는 제목의 책에서 양심과 책임에 대해서 얘기한 부분이다. 이 또한 얼마나 파격적인지, 대체 내가 반평생을 어떻게 살아온 것인지......
나무와 그늘처럼 의무나 당위나 규범에 의한 양심이 아니라, 그 누구에게도 강요받지 않은 자연스러운, 자신의 역량에 의한 양심이란 것이 내게 어디에 숨어 있단 말인가. 니체는, 우리는 이미 어떤 법칙에 의해 죄책감과 양심의 가책을 느끼도록 본능적으로 시스템화되어 버렸다고 말한다. 단죄하고 스스로에게 짐 지운다는 것이다.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태어나면서부터 또는 키워지면서.
규범을 넘어 자기로부터 자신의 덕을 찾아내는 그래서 파토스적인, 의무가 아닌 놀이로서의, 다시 한 번 해보자는 힘에의 의지, 천부적 생명력.
'논어'에서도 후회나 반성은 행동에 대해서만 하라고 말하고 있다. 왜냐면 다음에 잘하면 되니까, 인간 존재 자체에 대해서는 그럴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즉 '나쁜 결과'의 반대말은 '좋은 결과'가 아니라 '좋은 의도'이니까.
'니체'라는 두 글자 아래의 늦여름에서 초가을까지, 이십여 명으로 시작해서 십여 명이 남았다. 추석 대 명절 긴 긴 연휴라는 장애물에도 불구하고, 천장에 매달린 전구알 같은 햇 단감을 따들고 우리는 계속 모였다.
그래도 아직 잘은 모르겠다. 니체도, 그의 시대도, 그의 저작도, 사상도. 그렇지만 물들었을까, 닮아가나, 십여 회의 니체와의 만남 이후 집에서 나오는 발걸음과 집으로 돌아가는 표정이 점점 가벼워진다.
'나'의 무한성을 내가 긍정하고, 가족들에게 당당하게 가족으로서의 각자의 의무를 이행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내가 다 지지 않아도 되는, 나누어 져도 되는 짐의 무게만큼, 덜어놓은 시간과 에너지의 여유만큼 가장 가까운 사람에게 나의 사랑을 표현하기 시작했다.
넉넉한 표정으로, 중간 톤의 느린 말투로, 한 발짝 더 다가서는 체위로.
이제 니체를 제대로 읽기 시작할 수 있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