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문학 향기 넘치는 전주 : 어떻게 살 것인가? -
한벽문화관에서는 10월 12일부터 26일까지 매주 목요일 인문학 강의가 진행되었다. 각 주제별로 강의가 진행되었는데 기자는 19일에 정희진 작가의 강연(내 몸이 한권의 책을 통과할 때)을 들을 수 있었다.
인문학 강의, 인문학적 교양, 인문학이 사라지는 대학 등 '인문학'은 꾸준히 뜨거운 감자이다. 그렇다면 인문학이란 무엇일까? 포털사이트에 인문학을 검색하면 '인문학이란, 인문학이란 무엇인가, 인문학을 배워야 하는 이유'등 인문학의 정의를 묻는 연관 검색어가 뜬다. 기자 역시 인문학에 대해 정확히 정의를 내리지 못하고 뜬구름 잡는 식으로 적당히(?) 정의를 내리고 이해했다. 이 글을 읽는 독자는 인문학이란 무엇이라 생각하는가?
인문학이 무엇인지 묻는 정희진 작가의 물음에 한 청중은 인문학이란 '세상과 나를 이해하는 학문'이라고 대답했다. 이에 대해 정희진 작가는 '세상이라는 범위가 너무 넓어요. 또한, 구체적이지 않아요. 무엇이 세상이고 나는 누구인가요? 여러분은 여러분을 잘 아시나요?'라고 반문하였다.
이에 계속해서 앎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자기 자신을 아는 것이며, 이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는 사람은 모두 죽는다는 중요한 전제를 깔아야 한다고 말했다. 정희진 작가는 '나라는 사람이 신체적으로 있으면 외부·세계에서 일어나는 '일'을 우리는 인식합니다. 일이라는 게 인간관계, 세상사, 책, 영화일 수도 있고 어쨌든 세상 밖의 텍스트이지요. 총체적인 앎은 내 몸 밖에서 나를 통과해야만 내가 됩니다. 그대로 통과하거나 내 몸에 머무르거나 어쨌든 내가 그것을 받아들이는 담지가가 되는 것이죠. 그렇기 때문에 내가 죽으면 없어지게 됩니다. 따라서 가장 중요한 것은 모든 지식은 자기한테서 나온다는 것입니다.'라며 나를 아는 것이 곧 앎을 아는 것이라고 강조하였다. 그러면서 인문학이란 '맥락 속에서 나에게 돌아오는 것'이라고 정의하였다.
정희진 작가는 설명을 덧붙이며 나를 아는 것이란 자신의 취향을 파악하는 것도 해당되겠지만 단순히 여기서 그치지 않고 '사회 구조 속(계급, 인종, 젠더)에서 자기 위치를 파악하는 것'이라고 얘기했다.
''너 자신을 알라'는 잘못 번역이 되었어요. 보통 '성찰(省察)'의 의미로 통용되지만, 반영(reflexive)의 의미에요. 결국, 모든 것이 나에게로 귀착되는 것, 나에게로 회귀하는 것이며 그게 곧 나 자신을 아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바깥의 지식은 의미가 없습니다. 나를 알아야지 그 바깥의 지식이 내 몸에서 어떠한 삼투압 작용을 일으켜서 내가 인식하느냐가 중요한 것입니다. 어떤 사건이 나를 통과했을 때 나에게로 귀착되었을 때, 나에게로 돌아올 때, 내가 그것을 인식하는 과정에서 자기를 아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외부에서 어떤 식의 앎의 자극이 있을 때 그것은 그 자체로 진리가 아니게 됩니다.'라고 말했다. 결코 쉬운 개념이 아니어서인지 이에 관한 질문이 질의응답 시간에 이어졌다.
- 시민
- 인문학이란 자기를 아는 것. 계급, 인종, 젠더에서 자기 위치를 찾는 것이라고 말씀하셨는데 요즘 사람들은 자기를 정의할 때 자기도취적으로 각자도생으로 한다 하셨습니다. 저는 제 위치를 정확하게 알고 싶은데 저 세 가지를 제 안에서 제가 이해를 했는데 잘못 알 수도 있지 않은가요? 이것이 옳은 방향인지 자기도취적인지 알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요?
- 정희진 작가
- 이미 이런 고민을 하는 것 자체가 반영적 자아를 가지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그런 측면에서 그런 걱정은 안 하셔도 될 거 같습니다. 모든 인간이 무오류의 인간은 아니잖아요? '자기 위치를 안다'라는 개념이 정확하게 자기 위치 위도, 경도에서가 아니라서 이 문제는 굉장히 복잡해요. 또, 나 자신은 변해요. '현실을 변화시키지 마라'는 말이 있잖아요. 내가 변해야 한다고 이야기하는데 왜 현실을 변화시키지 말라고 하냐면 현실을 변화시키려면 현실을 인식해야 하는데, 현실을 인식하는 순간 현실 또한 변하고 있어요. 결코 쉬운 일이 아니지요.
- 시민
- 지금 옳은 길인지 계속 고민하고 질문하는 것이 잘 가고 있는 것이라는 말씀이신가요?
- 정희진 작가
- 네, 이런 말이 있잖아요. '인간은 방황하는 한 성장한다.'
2시간.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길다고 할 수 있는 시간이다.
정희진 작가는 인문학뿐만 아니라 다양한 주제를 곁들여가며 강의를 이끌어갔기에 목요일 밤의 2시간은 매우 짧게만 느껴졌다. 정희진 작가는 강의할 때 가장 많이 하는 말이 '오늘의 주제는 아니지만'이라고 재치 있게 말하며 짧은 강의 시간을 아쉬워하였다. 이러한 감정은 비단 정희진 작가뿐만 아니라 강의를 듣고 있던 모든 청중이 느꼈으리라 짐작해본다.
기자는 모든 이들은 수많은 문이 있는 방에 있다고 생각한다. 방의 크기도, 문의 개수도 알 수 없다. 새로운 경험·느낌을 통해 새로운 문이 계속 생성되고 열리기 때문이다. 기자는 이번 강의를 통해 새로운 문이 열리는 것을 경험했다. 기자가 듣지 못했던 저번 강의도, 다음 강의 역시 새로운 문이 열리는 경험을 선사해 준 강의라고 감히 생각해본다.
글·사진/곽정현(시민학습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