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주시평생학습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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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별별학습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관리자2018-04-20조회 2641
'별별학습'이란 평생학습의 새로운 학습 내용과 경향(공간, 사람, 정책 등)을 소개하는 공간입니다.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 우리는 왜 인문학을 공부하는가? -



 유사 이래로 인간은 앎을 추구해왔다. 살아가는데 직접적으로 필요한 지식들은 백성들이 인간에 대해 탐구하는 간접적인 지식은 상류층이 점유했다. 오랜 시간 많은 사람들은 글을 모르고 인간에 대해 연구할 시간도 방법도 모르고 살아왔다. 어슴푸레 서글프게 느껴지는 뭔가가 있더라도 그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 수도 없었고 바로 묻어야 살 수 있었다.

  우리 인생에서 가장 에너지가 넘치는 시절인 청소년기는 주변에 대해 질문이 쏟아지는 시기이다. 우리가 발을 딛고 살아가는 공동체에서 왜 자신이 이런 환경에 처해있는지 그 원인은 무엇인지 궁극적으로 짚어보고 싶어 하기 때문이다.

나이가 들면서 사회에 발을 들이게 되고 직접적으로 와 닿는 부분이 많아지면서 좀 더 쉽고 편하게 사는 방법을 택하게 된다. 예전처럼 모든 것에 관심을 쏟고 시간을 들일 에너지와 여유는 사라진다. 선택과 집중을 하게 된다. 그러면서 삶 자체에 대해 생각할 겨를도 없이 앞만 보고 달리다 넘어지면 허탈할 따름이다. 대체 무엇을 보고 생각하며 살아왔나 하는 근본적인 물음.

  인간이란 무엇인가? 라고 물으면 대답할 말이 없다. 도대체 인간이란 무엇일까.

'인문학'은 흔히 인간에 대해 탐구해 온 결과물이 쌓인 학문이라고 한다.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은 없고 기존에 있던 것이 조금씩 방향을 바꾼 것들이 인간의 역사를 이루었다. 인간은 어떤 패턴에서 벗어나지 않기 때문에 무리를 이루어도 상황만 다를 뿐 행동 패턴은 비슷하여 세계가 앞으로 나아갈 방향-앞으로 인간들이 변화할 방향-을 알고 싶다면 인문학을 공부하는 것이 도움이 된다는 이야기가 들려온다. 과연 그래서 우리는 인문학을 공부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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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주시 평생학습관에서는 올해 들어 '동서양의 근대성'을 탐구하는 인문학 강의를 개설하였다. 기자는 그 중에서도 아시아의 근대성에 대한 강의를 들었다. 아시아의 근대성이라고 하면 가장 먼저 식민지적 근대성을 떠올린다. 모두가 자주적으로 서양의 근대적 사상이나 생활 방식, 여러 가지 제도들을 받아들인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 당시 서양은 인간은 문명인과 야만인으로 나뉘며 자신들은 문명인이고 자신들과 같은 방식으로 생활하지 않는 사람들은 야만인이라고 단정했다. 우리나라에 온 서양인들은 이 야만인들을 빨리 근대화, 즉 서구화시켜야 한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이런 방식으로 근대에 발을 들이게 된 우리나라 사람들은 결국 근대화란 서구화라고 생각하게 된 것이다. 그런데 과연 근대화가 서구화인 것일까? 아시아의 자주적인 근대성은 어디로 간 것일까?

중국의 사상가인 '루쉰'은 동아시아의 근대적 사상가 3인 중 한 명으로 손꼽힌다. 그는 중국 민중들의 봉건성과 식민성을 통렬하게 비판하며 그들이 스스로 일어서는 주체적인 민중이 되길 바랐다. 끊임없이 배우고 익히며 자신이 발전하기 위해 스스로 모든 방법을 찾으며 노력하는 사람이. 이런 그의 정신은 그의 유언에도 잘 나타난다.

우리는 해외여행이라고 하면 유럽 여행을 꿈꾼다. 그들이 쌓아올린 찬란한 문화들을 부러워하며 왜 우리는 그런 문화가 없는지 아쉬워한다. 수많은 유물이 모인 박물관, 유명한 화가의 작품이 있는 미술관, 세계에서 다양한 사람이 모이는 유적지.

우리는 우리의 것을 조그맣게 보고 유럽을 꿈꾼다. 유럽의 문화가 아시아의 문화보다 위대해서일까? 아니면 우리가 무의식적으로 그렇게 생각하게 된 것일까? 기자는 그것이 근대화가 우리 선조들의 손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어서라고 생각한다. 서양 문화에서 비롯한 식민지적 근대화로 인해 비롯된 것이라고.

루쉰은 이런 미래를 내다보지 않았을까. 남의 것에 기대어 가는 삶은 너무나도 편하다. 머리 아프게 생각하지 않아도 되는 삶. 남의 지시대로 살아가는 삶은 불투명한 미래 앞에서 두려워하거나 온 힘을 다해 달려나가지 않아도 된다. 그러나 결국 더 큰 이득을 노리는 세력들에게 잡아먹히고 만다. 편하게 살아온 대가는 너무나도 컸다. 여기에서 우리는 주체성의 중요함을 깨닫는다. 중세의 봉건성에서 벗어난 근대적 주체성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는 것을.

중세의 인간은 무언가에 속해 있었다. 크게는 신, 작게는 작은 공동체를 다스리는 자에게. 하나하나의 인간은 자유롭게 생각할 수 없었지만 큰 틀에 기대기만 하면 인간 존재를 고민하지 않고 살아갈 수 있었다.

그러나 근대에서 인간은 신이라는 절대적인 존재에게서 벗어나 온전히 홀로 서게 되었다. 알 수 없는 미래를 두려워하고 방황하며 스스로의 존재를 자신이 세워야만 했다. 그래서 인간은 중세와는 다른 공동체를 만들었다. 개인의 의견이 모여 만들어진 국민국가가 탄생했다. 그리고 그때보다 더 많은 자유와 권리, 의무가 주어진 지금은 근대에 비해 개인이 주체적으로 살아간다.

중세 이전이라면 평범한 사람이 손에 쥘 수 있는 지식은 턱없이 적었을 것이다. 그러나 현대는 정보 과잉시대라 불릴 정도로 정보가 범람하고 있다. 과연 이 정보들에 압사당하지 않고 한 인간이주체적으로 살아갈 수 있을까.

  이 강의를 듣게 된 이유도 여기에서 나온다. 인간이란 무엇인가?

단순히 피와 근육, 뼈와 살로 이루어진 본능에 따라 움직이는 개체는 아닐 것이다. 우리가 동물과 다른 것은 본능에 저항하며 스스로의 정체성에 대해 고뇌하고 자유로운 한 개체로서의 삶을 확립하기 위해 발버둥치는 점이다. 이런 노력은 현대를 사는 우리들만이 아니라 인간이 생각을 하게 된 순간부터 시작되었다. 인생은 살아있는 한 계속된다. 그러므로 죽는 그 순간까지 한 인간의 정체성은 계속 변화할 수 있다.

'인문학을 왜 배우냐'는 물음이 나온다면 우리는 인간이며 동물처럼 먹고 살기 위함만이 우리 삶의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라는 대답이 나올 것이다. 그리고 변화하는 세계 속에서 변함없이 '나'라는 인간으로 존재하기 위해서 사는 날 동안 인간에 대해 고민하려 인문학을 접할 것이다.

매주 화요일, 전주시 평생학습관에서는 이러한 생각을 하는 사람들을 위해 두 달마다 다른 소주제로 인문학 강의를 열고 있다. 혼자 생각하는 것이 힘겹게 느껴진다면 처음 딛는 인문학의 바다에서 어느 길을 갈까 고민된다면 저곳을 찾아가보는 것은 어떨까.

숲으로 난 두 갈래 길 중 풀이 무성한 길을 걸어 삶이 바뀌었다고 하는 미국의 어느 시인처럼 가끔은 평소에 가지 않는 다른 길로 걸어보자. 지금까지의 삶과는 아주 조그만 변화를 맞이하러.


글ㆍ사진/김효선(시민학습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