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별별학습내가 너일 때 나는 가장 나이다-2022 전주시민인문포럼을 마치며
관리자2022-12-22조회 1237
“내가 너일 때 나는 가장 나이다.” 시인 파울 첼란의 말입니다. 2022 전주시민인문포럼에 참여하면서, 이 문장의 의미를 여러 번 곱씹게 됩니다. 우리는 왜 배우며, 무얼 가르치고 있는 것일까요. 기본적으로 가르침의 기술과 행위는 변증법에 기반을 둡니다. 가르치는 사람과 배우는 사람의 끊임없는 상호 관계를 통해 인간은 자신의 삶을 수정해 나갑니다. 가르침과 배움이 주는 기쁨이며, 이상적인 교환 과정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 과정을 통해서 배우는 사람은 가르치는 사람을 넘어서서, 자신의 목소리(정체성)를 찾아갑니다. 저는 이러한 현상을 농담 삼아 토사구팽(兎死狗烹)의 미학이라고 부릅니다.
사전적인 의미 그대로 토사구팽은 ‘토끼 사냥이 끝나면 사냥개를 삶아 먹는다’라는 뜻입니다. 조금 거친 고사성어를 예로 든 이유는 평생교육을 이끌어 가는 사람은 세터(Setter)의 역할을 자처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우선 세터는 웅크려서 사냥감의 위치를 알려주는 영국의 사냥개를 뜻합니다. 또한, 스포츠의 일종인 배구 경기를 할 때 공중으로 공을 알맞게 들어 올려주는 선수를 뜻하기도 하지요. 같은 팀 선수가 힘껏 점프하여 자신감 있게 스파이크를 할 수 있도록 돕는 역할입니다. 이럴 때 평생교육 학습자들은 교조주의(Dogmatism)적 우상에 매몰되지 않고 스스로를 관찰하고 자기 고유의 본성을 회복하려는 마음을 갖게 됩니다. 교조적인 결론이 무조건 잘못된 것은 아니지만, 무조건 권위자의 목소리에 자기 사유를 기대는 것은 왠지 모르게 인문학적이지 않다는 생각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태도로 배우고, 서로 가르쳐야 할까요. 저는 그 방향성을 가장 잘 제시한 사람이 칼 세이건이라고 생각합니다. 칼 세이건은 ‘회의주의의 짐(The Burden of Skepticism)’에 대한 강연을 통해 회의주의와 경솔한 믿음 간의 본질적 긴장을 이렇게 요약합니다. “상충하는 두 가지 욕구 사이에 절묘한 균형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중략) 모든 생각들이 똑같이 타당하다면 여러분은 길을 잃고 말 것입니다. 결국 어떤 생각도 타당성을 갖지 못할 것이겠기에 말입니다.” 두고두고 곱씹어 볼 필요가 있는 전언입니다. 여기에 더해 칼 세이건은 가르치고 배우는 자세에 대해서도 매우 친절한 해결책을 제시합니다. 가령 이런 문장이지요. “제일 중요한 건 자신이 답을 모르는 질문을 아이가 던질 때 겁먹지 않는 겁니다. 질문에 대한 답을 모르겠다고 고백해도 정말 괜찮습니다. (중략) 그러니까 만약 답을 모르겠다면 ‘같이 찾아보자’고 말하면 됩니다. 백과사전이 없다면 도서관에 가면 됩니다. 그것도 싫다면 최소한 이렇게 말하면 됩니다. ‘그 질문에 대한 답은 아무도 모를지 몰라. 어쩌면 네가 커서 그 답을 처음 알아내는 사람이 될지도 몰라’ 그런 게 격려입니다.”
칼 세이건의 전언을 기본으로 제가 2022 전주시민인문포럼에서 발표한 내용은 <인문학과 예술융합>이라는 주제입니다. 세분화해보자면 ‘시민+인문+예술+교육’에 관한 내용입니다. 사실 시민도 어렵고 인문학도 어렵지만, 예술은 더 어렵습니다. 낯설고 난해하기까지 합니다. 여기에 교육이라는 단어까지 덧대고 보니, 총체적 난국이 따로 없습니다. 그래서 저는 시민인문예술교육의 방향성을 한국문화예술교육진흥원(arte)에서 제시하는 핵심 키워드를 함께 검토하는 것으로 시작했습니다. 그 키워드는 ‘비틀’, ‘꿈틀’, ‘움틀’, ‘싹틀’, ‘동틀’입니다. 비틀은 ‘비틀어 보는 이슈’이며, 꿈틀은 ‘꿈꾸는 사람’, 그리고 움틀은 ‘움트는 현장’, 싹틀은 ‘싹트는 아이디어’, 동틀은 ‘동트는 리포트’를 뜻합니다. 문사철을 기반으로 하는 인문평생교육에서는 조금 가볍게 보이는 키워드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아르떼에서 제시하는 이 키워드는 어쩌면 지금까지의 위계를 지우고, 학습자 중심의 새로운 위상을 회복하는 선언처럼도 보입니다. 이 키워드는 전주시 평생학습관의 추후 방향성을 논의하는 데도 매우 유효할 거란 개인적 판단입니다.
인문포럼을 통해 제가 마지막으로 강조한 부분은 ‘야무진 인문학’과 ‘질문하는 힘’의 발견입니다. 야무지다는 말은 일반적으로 “사람의 성질이나 행동, 생김새 따위가 빈틈이 없이 꽤 단단하고 굳센 모양”을 뜻합니다. 야무지기 위해서는 반드시 시민이 함께 어우러져야 합니다. 조직적이고 체계적인 형태가 아니어도 좋습니다. 풀뿌리처럼 끊임없는 무질서의 반복을 통해서도 가능합니다. 그런 무질서의 평생학습이 반복되다 보면 그 안에서 새로운 학문적 질서가 형성되기도 합니다. 조금 먼 비유이긴 하지만 베르나르 베르베르는 「상상력 사전」 속 「오믈렛」이라는 글은 이런 주장을 충분히 뒷받침해줍니다. “질서는 무질서를 낳고 무질서는 질서를 낳는다. (중략) 결국 질서란 무질서의 결합에 지나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우리 우주는 어떤 질서의 일부이다. 우주가 확장되면 될수록 점점 더 무질서한 상태로 빠져든다. 무질서가 확장되면 새로운 질서들을 낳는다.” 다양한 측면에서 여러 번 곱씹어봐도 참 멋진 문장입니다. 야무진 인문학은 어쩌면 카오스(Chaos, 혼돈)와 코스모스(Cosmos, 질서)의 합성어인 ‘카오스모스(Chaosmos, 혼돈 속의 질서)를 끊임없이 지향하는 평생교육의 과정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다른 하나는 시민의 ‘질문하는 힘’입니다. 세상의 모든 질문은 리터러시(Literacy)를 이루는 기본토대가 됩니다. 평생학습의 전 과정을 통해 학습자는 ‘읽고 생각하고, 말하고 쓰는 능력’을 함양합니다. 이런 과정의 오랜 반복을 통해서 결국 한 인간은 ‘호모 스크리벤스(Homo Scribens)’가 됩니다. 말 그대로 ‘글을 쓰는 인간’으로 성장하는 것이지요. 글을 쓴다는 것은 자기 삶을 산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끊임없이 자기 사유에 의문을 가지고 질문을 던진다는 의미입니다. 끊임없이 질문하는 사람은 결국 어떤 식으로든 자기 삶을 살게 됩니다. 평생을 질문하며 공부하는 에세이스트가 되는 것이지요. 질문의 왕으로 불리는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모습을 떠올려 볼 수 있습니다. 다빈치는 평생을 ‘페르케, 페르케, 페르케’라는 단어를 입에 달고 살았습니다. ‘페르케(perche)’는 이탈리아어로 ‘왜’라는 뜻을 지닙니다. 매사 ‘왜’라는 질문의 과정은 다빈치를 어떤 인물로 성장시켰는지를 잘 대변해 줍니다.
2022 전주시민인문포럼의 발표를 마무리하면서, 저는 우리는 왜 가르치고, 왜 배우는가에 대해 오래 고민하였습니다. 서두에 이야기했던 “내가 너일 때 나는 가장 나이다”라는 파울 첼란의 말도 멋있고, 여기에 덧대어 독일의 시인인 라이너 쿤체의 시 「변증법」이 마침표처럼 떠오르기도 하였습니다. “모르는 사람들아 / 내가 너희를 가르치겠다 / 너희가 끝내 모르도록” 우리가 끝내 모르도록 배우고 가르치는 일은, 어쩌면 무척이나 고단하고 어렵기만 합니다. 하지만 이게 바로 평생교육의 목적입니다. 무조건 아는 일보다도 더 중요한 것은 우리가 모른다는 사실을 잘 이해시키는 일이지요. 그렇게 2022 전주시민인문포럼에서의 발표를 마무리하였습니다. 2022년 한 해 동안 다양한 평생교육 프로그램을 기획해주시고 이끌어주신 전주시 평생학습관 선생님들께 감사의 마음을 전하면서, 저 또한 인문 세터의 한 사람으로서 “내가 너일 때 나는 가장 나이다.”라는 평생교육의 가치를 다시 한번 공중에 띄워드립니다.
글쓴이
김정배(글마음조각가, 원광대 교수)